카테고리 없음 / / 2024. 2. 2. 10:36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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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외

                                                    

 

-- 베를린 대학에 제출한 쇼펜하우어의 이력서(1819)를 보면 쇼펜하우어는 단치히에서 태어났다.

 내가 이 세상에서 햇빛을 보게 된 것은 1788년 2월 22일이었다.  부친은 하인리히 프로리스 쇼펜하우어이다.  모친은 오늘날에도 건재하며 일련의 저작으로 유명하지만,  처녀시절에는 요한나 헨리에테 토로지나라고 불렸다.  탄생 당시의 사정이 조금이라도 달라졌던들,  나는 이미 영국인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친은 해산달이 임박해서 비로소 영국을 떠나 고국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존경해 마지않는 나의 부친은 부유한 상인으로 폴란드 왕국의 궁정 고문관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인은 남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부친은 엄격하고 성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한편 품행이 바르고 정의감이 강하여 남에 대한 신의를 반드시 지키면서도 장사에 대해서는 뛰어난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내가 부친의 신세를 얼마나 졌는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부친은 나에게 원하는 직업이 그의 안목으로는 적합한 것이었을지라도 내 정신에는 결코 적합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부친의 덕택으로 나는 젊었을 때부터 실용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자유와 여가를 비롯해서 나의 천직인 학자로서의 교양을 얻는데 필요한 모든 것,  나의 목적을 추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모든 수단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또한 나는 청장년기에 접어든 후에도 부친의 덕택으로 쉽사리 여러 가지 이득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나의 성격이나 기질로 보아 이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었다.   즉,  나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걱정에서 완전히 벗어나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그 덕택에 오랜 시일에 걸쳐서 나는 돈벌이와는 관계가 없는 학문연구나 매우 어려운 탐구와 명상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번거로움이나 방해를 전혀 받지 않고 연구하고 숙고한 것을 집필할 수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은 그분의 덕택이다.

 

                                    -- 베를린 대학에 제출한 쇼펜하우어의 이력서(1819) 의 내용 일부----

 

부친의 애정으로 말하면,  그는 무엇보다도 내가 안정된 생활을 보내기를 원했으며,  그의 머릿속에는 학자와 가난이란 두 개념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굉장한 반대를 하였지만, 결국 쇼펜하우어는 학문연구하는 철학자의 길에 들어섰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외' 책을 읽다보면,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불교나 동양의 철학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존의  서양철학사에서 당연시 하던 이성 우세론에 반기를 들고 인간은 이성이 아니라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라는 관점을 세웠다.

 

이성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주류철학의 흐름과 달리 쇼펜하우어는 세계가 의지로서의 세계이고 인간은 이 의지로서의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란 모든 만물을 지금 그것으로 존재하게 하는 힘으로 모든 사물의 내적원리,  생명의 원리, 생명 에너지, 즉 자연속의 모든 힘을 말한다.

의지는 항상 사물 속에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한다 .  그런데 이 의지는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움직인다.

 

그러한 의지에 따라 인간은 움직인다고 주장한 쇼펜하우어는 이전의 이성 중심 철학에서 말하는 '이성에 따르는 인간'을 부정하고 인간의 행동은 이성적 결론이 아닌 감정에 따라 일어난다고 보았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에게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 아니라 의지라고 보았다.

인간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이유없이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의지에 의해서 일희일비 하는 것으로 의지는 이성이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스스로 제어할 수 없고 그저 의지의 흐름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면 성과를 얻는 것이고 방향이 다르다면 고통을 받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인간은 고통 자체보다 고통에 대한 표상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예를 들자면 친한 사람에게 언어폭력을 당했을 때 사람은 '언어 폭력'을 당했다는 사실도 고통이지만 '어떻게 저 사람이 나에게 그럴 수 있는가' 라는 본인이 인식하는 내용으로 더 고통이 커지는 것이다.  즉 고통에 대해 이 고통은 왜 나에게 오는가 하는 추가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맹목적인 의지로 인한 고통이 있음을 수용하면 고통으로 인해 많이 고통스럽지는 않게 된다.

 

여기서 표상은 인간이 충분근거율(존재의 근거율, 인식의 근거율, 생성의 근거율, 행위의 근거율)에 따라서 인식하는 내용이다.   즉,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근거율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세계가 표상으로 되어 있고,  이러한 표상 능력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할 수 있는 모든 존재자에게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즉 동물도 표상 능력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성 능력은 인간에게만 있고,  동물표상 능력 보다 인간의 표상능력이 고차원적이고,  표상은 감각이 제공한 상들을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에 의해 생기는데,  그 정신적 능력에서 동물보다 인간이 더 고차원적이다는 것이다.

 

 

동물들은 아무래도 결핍상태에 놓이기 때문에 다만 순간적인 즐거움과 극히 사소한 일시적인 기쁨밖에는 누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고생을 하며 언제나 투쟁속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

저마다 먹이를 쫓고,  한편 먹이가 되어 쫓기고 있다.  동물의 생활은 곤경.결핍.곤궁.불안.비명.포효의 연속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광경이 끊임없이,  지구의 표피가 다시 붕괴할 때까지 계속되어 나간다.

 

인류의 경우에는 분명히 사정이 더욱 복잡하며 특이한 위엄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생각에는 조금도 다른 것이 없다.  즉 인류의 경우에도 삶은 즐기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뼈가 빠지도록 일해야 한다는 과제를 짊어지고있다.  그러므로 신분의 고저,  신체의 대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은 심신을 다해 전력을 기울이면서도 재난을 당하며,  끊임없이 일하고 언제나 분주히 투쟁에 나서서 무리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각각 민족을 형성하고 있는 몇 백만의 사람들은 공동의 복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또한 각 개인은 자기의 행복을 위해 열심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몇 천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어 쓰러져가고 있다.

대체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망상에 사로잡히거나,  혹은 애써 머리를 짜낸 끝에 수립한 정책에 따라 그들은 서로 싸움터로 끌려가게 마련이다 오직 한 사람의 착상을 실행하거나,  그의 실패를 보상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피땀을 흘려야 한다.

 

나의 견해에 따르면 이렇게 힘을 기울이는 노력과 손에 넣는 보상 사이에는 분명한 불균형을 찾아볼 수 있으며  삶의 의지는 모든 생물들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을 향해 온갖 힘을 쏟고 있는 모습,  즉 객관적으로 보면 어리석은 일로서,  주관적으로 보면 미망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더욱 세밀히 관찰해 보면 삶에의 의지는 오히려 맹목적인 충동,  즉 전혀 근거가 없고 동기도 찾아볼 수 없는 충동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모든 목표도 한계도 없다는 것은,  무한한 노력 자체인 의지의 본질에 속해 있다.

물질의 노력은 언제나 방해받고, 결코 만족하거나 충족감을 느낄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의지의 모든 현상에 대해서도 대입하여 말할 수 있다.   현재 도달한 목표는 새로운 목표에 이르기 위한 새로운 코스의 출발점이며,  결국 같은 일이 무한히 되풀이 된다.

 

식물계의 현상에 있어서는 싹이 터서 줄기와 잎사귀로 성장하고 다시 꽃을 피워 열매를 맺게 하지만 이러한 것도 실은 새로운 싹,  새로운 개체의 출발점에 불과하고,  새로운 싹은 다시 전과 같은 코스를 거치게 되며 ,  마찬가지고 무한한 시간 속을 지나간다.

 

한편 동물의 생활도 마찬가지다. 생식은 동물의 생활의 정점이다.  목적이 달성되면 첫 개체의 생명은 조만간 쇠퇴하고 그 동안에 자연이 새로운 생명은 종족의 보존을 확보한다.  그리고 같은 현상이 되풀이 된다.

 

영원한 생성,  무한의 유출이 의지의 객체화의 본성이다.  같은 일이 드디어 인간의 노력과 욕망 속에도 나타난다.

인간은 욕망의 충족을 언제나 그들의 의욕의 최종목표로 삼고 있다.

모처럼 손에 넣은 목표도 시들해지고 곧 옛날 일을 잊어버리고 언제나 이것을 사라진 환상으로 돌려 버린다.

그래서 인간은 욕망의 노예라고 했던가

 

이 모든 일들로 미루어 보더라도 인식이 그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의지는 현재 자기가 이 장소에서 무엇을 원하는가를 알고 있다.  그러나 자기가 일반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모든 행동은 목적을 갖고 있지만,  총체적인 욕구는 이렇다 할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  모든 개개의 자연현상이 이 장소,  이 시점에 등장하는 것은 충분한 원인에 의해 제약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현상들 속에 나타나는 힘이 일반적으로 원인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이것이야말로 물자체 근거가 없는 의지의 현상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론에 들어가 이런 강한 형이상학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방법이 있으니 이에 대하여 고찰해 보기로 하자.   여기서 형이상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능한 한도 내에서 경험 이상으로 자연, 즉 사물의 당면한 현상을 초월하여 이들 현상의 근원이 되는 것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려는 인식으로,  좀 더 알기 쉽게 말해서 자연속에 그 토대가 숨어 있는 것에 대한 인식을 가리킨다.

 

그런데 인간의 이해력에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으며 게다가 그 수련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므로 개인차가 심하다.   이로 말미암아 한 국민이 야만의 상태를 벗어난 직후에도 사람들은 하나의 형이상학으로는 부족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문명인들 사이에는 이에 전혀 다른 부류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 신뢰하고,  하나는 자기 이외의 것에 신뢰를 둔다.

 

 

형이상학의 세계가 이와 같이 조금도 쉬지않고 움직이며 불안한 것은, 즉 이 세계는 존재하지만 이와 마찬가지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식에서이다.  그리고 철학적 사색을 일으키는 이 놀라움은 세계의 해악과 재앙을 목격하기 때문이며,  이것들이 정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또 이런 일보다 기쁨이 더 우세하다고 하더라도 이것들은 없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무에서 유가 생길 리가 만무하므로 이것들도 그 싹이 그 근원,  즉 세계의 핵심 자체 속에 깃들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형이하학의 세계가 광대하고 질서가 있으며 완벽한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세계를 낳은 힘이 해악을 피할 수 없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 원인이 작용하는 것은 각각 자연의 법칙에 기인하지만,  끝내 자연의 힘으로 귀착되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형이상학은 사유의 세계를 논한다면,  형이하학은 현실의 세계를 직시한다는 점에서 서로 판이한 입장이고,  종국적으로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지향하며 세계는 변화발전한다는 실천적이고 사실적인 것에 토대를 두고 있다)

유물론적(물질주의는 만물의 근원을 물질로 보고,  모든 정신 현상도 물질의 작용이나 그 산물이라고 주장함)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하는 것은 의지가 나타나는 방식,  즉  생명이나 실재의 방식은 실로 오직 현재뿐이며,  미래나 과거는 단지 개념 속에 있을 뿐  인식이 근본 원리에 따르는 한 이렇게 존재할 뿐이다.

과거에 살았던 인간도 없고,  장차  살 인간도 없으며,  살아있다는 것은 다만 현재 뿐이다.   그러므로 현재만은 생명에서 제거할 수 없는 분명한 소유물이다.   현재는 언제나 그 내용을 갖추고 보존한다.   의지가 있다면 생명이 있고,  그 생명에는 현재만이 분명하다.   지나간 수 많은 날을 회고하고,  또 그 가운데 살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에게 무엇이 있는가,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어제의 일조차 상상 속에 있는 공허한 꿈이며,  과거의  사람들의 일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거기 무엇이 있었는가?

그리고  무엇이  남아 있는가?  오로지 의지뿐이며 생명은 그 의지를 반영하고,  의지를 떠난 인식은 이 거울 속에서  분명히

의지를 바라보게 된다.   이것을 인정치 않고,  또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 사람은 과거의 사람들의 운명에 대하여 위의 문제에 덧붙여 물어야 한다.

 

수천만의 인간들이 과거로 돌아가고 그 중에는 영웅과 현자도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과거의 긴 밤에 묻혀 무로 돌아갔지만,  이 물음을 던지는 나만이 이와 같이 사라져 가는 귀중한 존재의 실제 내용을 소유할 수 있는 행운을 갖게 된 것은 어찌된 영문일까?  그리고 이 작디작은 나만이 현재 여기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혹은 다른 말로 짤막하게 말해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더욱 기이하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현재는 어찌하여 현재 여기 있는가?   어찌하여 이 현재는 이미 지나가 버리지 않았는가?

 

과거나 미래의 내용은 오직 개념이나 공상뿐이므로 현재는 의지가 나타나는 본래의 방식으로 그것을 떠날 수 없다.  언제나 있고 분명한 것은 단지 현재일 뿐이다.

 

끊임없이 생겼다가 소멸되고,  혹은 자기에게 있었던 것,  또는 닥쳐올 것이 되는 것은 현상이며,  이는 생멸을 나타내는 방식에 의해 생기게 된다.   의지가 있으면 생명이 있고 생명에 있어서는 현재만이 확실하다.   

그리하여 누구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어쨌든 현재의 주인이다.  그리고 이 현재는 영원히 언제나 그림자처럼 나를 따른다.  그러므로 현재가 어디서 왔는지 또 어찌하여 현재가 바로 있는지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와 같이 묻고 나면 자기의 존재와 자기의 시간은 서로  독립되어,  존재를 시간 속에 던져 넣는 것처럼 될 것이다.   이렇게 묻는 자는 한편으로는 객관의 현재와 또 한편으로는 주관의 현재, 이와 같이 두 현재가 있으며 이 양자가 용케 하나로 결합되는 데 놀라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인식의 주관은 결국 어느 의미에서는 의지 자체이거나 또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리고 의지에게는 자기 자신의 표현인 생명이 확실한 것처럼 현재만이 현실 생명의 유일한 형식이다.

그러므로 생명 이전에 있던 과거나 죽은 후의 미래와 같은 것은 탐구할 성질의 것이 못 되며,  의지가 스스로 나타나는 방식도 현재뿐이므로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 의지를 떠날 수 없고 의지도 현재를 버릴 수는 없다.

 

자기 자신에게 닥친 가혹한 운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죽는다고 해서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세계는 낮에서 밤이 되고,  개체는 죽어가지만 불타는 태양은 영원히 변함이 없다.

 

살려는 의지에게는 생명이란 분명한 사실이며,  생명의 양식은 무한한 전재이다.   그러므로 자살은 헛된 일이요,  따라서 어리석은 행위이고,  앞으로 더욱 관찰해 감에 따라 자살은 터무니 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세상의 가르침은 변하고 인간의 의지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자연은 미혹되지 않고 그 행동은 확실하여 숨기는 일이 없다.  무엇이든지 자연 속에 있고 어디나 자연이 있다.  어떤 동물에게 자연의 핵심이 있으며,  모두가 가야할 길을 걸어왔고 또 앞으로도 걸어갈 것이다.  그들은 사멸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않고 살다가,  자기 자신이 자연임을 의식하고 또 자연과 같이 불멸임을 알게 된다.

 

인간은 자기가 반드시 죽을 것을 추상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때때로 어떤 기회에 죽음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만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은 반드시 오며,  또  오고 있지만, 인간은 아무 불안도 느끼지 않으며 언제까지고 죽지 않을 것만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은 의지의 본성이며,  의지란 다름아닌 살려는 의지로 그본성은 오직 생명과 생존을 원하는 강압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인식은 본래 의지가 동물의 객체화 된 결과로 생긴 것이다.  그리하여 인식의 매개로 의지는 이 현상과 자기를 동일시하여 자기는 이 현상에 국한되어 있다고 보고 죽음은 이 현상이 끝장나는 것이라고 해서 이를 기피하고 온 힘을 다해 배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는 욕구하고 인식하는 양면이 있으며,  이를 잘 구별해 보면 죽음을 두려워 하는 근원도 스스로 알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하여 상세히 말하고자 한다.

 

죽음이란 주관적으로는 뇌수의 활동이 중단되어 의식이 소멸되는 한 순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에 뒤이어 이 중단이 다른 국부에 퍼지는 것은 죽은 후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관적으로 말하면 의식에만 관계되는 일이다. 

 

의식의 소멸이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나 잠이라는 형태를 통해 어느 정도 이것을 알 수 있으며,  또 혼수상태에 빠진 적이 있는 사망은 처음에 시력이 사라지고 그 후에 곧 깊은 무의식 상태에 빠져 들어감으로써 죽음을 아는 데 더욱 유용하다.  

 

그 동안의 감각은 불쾌한 것이 아니며 수면이 죽음의 형제라면 혼수상태는 그 쌍둥이 형제이다.  죽음은 이 사람을 소멸시키지만 이 삶의 의지,  즉 인간의 본질은 죽은 후에도 다른 개인 속에서 생존을 계속한다.  

 

그러나 단지 현상에 지나지 않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속하며,  외부세계의 한낱 형식에 지나지 않는 이 사람의 지성은 다만 표상 속에만,  즉 사물의 이러한 객관적인 존재 속에만,   종래의 외계의 존재 속에서만 살아나간다.

이제야 이 사람의 자아는 지금까지 이 사람이 타자로서 간주한 그 속에만 종속된다.   

내면과  외면의 구별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나는 소멸된다. 그러나 세계는 존속한다'는 문장도 '세계는 소멸된다.  그러나  나는 존속한다' 는 문장과 근본적으로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누구나 자기의 기억 속에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하여 만족할 수 없던 점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그래도 누구나 생존을 계속해 나가는 한 그 사람의 성격의 불변성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같은 방법으로 행동할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자기 존재의 싹에서 새로운 다른 존재가 발생케 하려면 현재의 자기모습을 소멸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죽음이 그 결합된 사슬을 결단하는 것이다.

 

의지는 다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왜냐하면 움직이는 데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존재하는데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선인의 죽음은 모두가 평온하다. 

유명한 베다의 격언을 보면,  '죽음은  존재의 가장 내면적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일종의 혼란을일으키는 개성의 일면성에서 우리가 해방되는 순간이다'

 

기꺼이  죽는 것은 삶에의 의지를 기각하고 부정하는 체념자의 특권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만이 단지 겉보기 뿐이 아니라 실제로 죽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자기라는 인간이 지속되기를 원치 않으며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이러한 사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생존을 기꺼이 버린다.   이런 사람에게 생존의 대신이 되는것은 우리의 눈으로 보면 무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존도 그 대신이 되는 것과 관련시켜 보면 역시 무이기 때문이다.

 

불교신앙은 이것을 열반,  즉 소멸이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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